개인적인 뜻밖의 발견은 기술에 의해서도 배양할 수 있다. 10년 이상 전부터 나는 흥미롭다고 느낀 글들을 디지털 기록보관소에 모아왔다. 21세기 버전의 비망록이라 할 수 있다. 그중 일부는 구체적 프로젝트들과 관련된 내용이고, 다른 글들은 무언가와 연결되기를 기다리는 예감들이다. 일부는 내가 책이나 기사에서 옮겨 적은 것들이고, 일부는 웹에서 직접 복사한 것들이다(지난 몇 년간 구글북스(Google Books)와 킨들(Kindle) 덕분에 책에서 흥미로운 부분을 복사하고 저장하는 것이 훨씬 간단해졌다).
나는 그 글들을 모두 데본씽크(DEVONthink)라는 프로그램을 이용해 데이터베이스에 모아둔다. 거기에는 책, 에세이, 블로그 포스트, 메모 등 내가 쓴 글들도 있다. 그렇게 내가 쓴 글과 다른 사람들의 글을 결합함으로써 단순한 파일 저장 시스템 이상이 되었다. 그것은 나의 불완전한 기억력을 디지털 기구를 이용해 저장하게 해주며, 내가 예전에 떠올렸던 아이디어와 나에게 영향을 준 아이디어를 모두 모아놓은 보관소다. 현재 그 데이터베이스에는 5천 항목, 3백만 단어 이상의 글이 들어 있다. 내가 개별적으로 수집한 대략 6권에 해당하는 인용문들과 예감들이 하나의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되어 있는 것이다.
그 모든 정보를 언제든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내가 메모한 내용을 더 빨리 찾을 수 있다는 편리함만은 아니다. 물론 이 방법 덕분에 오래전에 내가 썼던 글을 찾는 일이 훨씬 쉬워졌다. 그러나 질적인 변화가 더 많다. 오래된 서류를 찾다가 전혀 뜻밖의 문서를 찾게 되는 것이다. 그 시스템이 진정 효과적인 것은 이렇게 뜻밖의 발견을 촉진하기 때문이다.
데본씽크의 특징은 서로 다른 글들 사이에서 미묘한 연관성을 발견하는 똑똑한 알고리즘이다. 이러한 도구는 고전적인 검색엔진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고전적 검색엔진에서 ‘dog’을 검색하면 ‘dog’이라는 단어는 들어 있지 않고 ‘canine(개)’라는 단어만 들어 있는 글은 찾지 못한다. 데본씽크는 ‘어떤 단어들이 함께 등장하는 경우가 많은가’를 추적함으로써 개별적 단어 사이의 연관성을 찾아낸다. 이 덕분에 아이디어 사이에 연결을 만들 수 있다.
수년 전에 런던에서 콜레라에 대한 책을 쓰고 있을 때였다. 나는 데본씽크에게 빅토리아 시대의 하수시스템에 대해 물었다. 데본씽크는 ‘노폐물(waste)’이라는 단어가 ‘하수(sewage)’라는 단어와 흔히 함께 사용된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척추동물의 몸에서 뼈가 진화한 방식을 설명하는 인용문도 찾아냈다. 즉 세포의 신진대사에 의해 만들어진 칼슘 노폐물을 다른 용도에 맞게 만들면서 뼈가 진화했다는 이야기였다. 처음에 그 인용문은 잘못된 검색 결과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글은 복잡한 시스템들이 ─도시든, 신체든─ 자신이 만들어내는 쓰레기를 생산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보여주었다. 결국 그 아이디어는 콜레라에 대한 책에서 한 장의 중심 주제가 되었다.
엄밀히 말해 그 최초의 아이디어는 누구의 것인가? 내 아이디어였나 아니면 소프트웨어의 아이디어였나? 말장난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진지하게 묻는 것이다. 분명 컴퓨터는 아이디어가 형성되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고, 런던의 하수구와 세포의 신진대사를 연결하는 개념적 고리를 제공한 것은 나였다. 그러나 그 소프트웨어의 도움 없이 내가 그런 연결을 할 수 있었을까. 그 아이디어는, 하나는 탄소에 기초하고 다른 하나는 규소에 기초한 2개의 아주 다른 정보가 싸우며 서로에게 이익을 준 진정한 공동작업이었다. 처음에 칼슘과 뼈의 구조에 대한 글을 보았을 때 나는 그 글이 런던의 하수시스템과 연결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개념이 나의 관심을 끌었기 때문에 그 글을 데이터베이스에 넣었다. 그렇게 느린 예감으로서 소프트웨어의 원시수프 속에서 몇 년을 머무르며 연결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데본씽크를 즉흥적인 도구로도 사용한다. 무언가에 대한 글을 한 단락 쓴다고 가정해보자. 예를 들어, 얼굴 표정을 해석하는 인간 두뇌에 대해 글을 쓴다. 그 글을 데본씽크에 넣은 후 비슷한 글을 찾아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면 즉시 화면에 인용문 목록이 나타난다. 그중에는 얼굴 표정을 촉발하는 신경구조를 분석한 글도 있고, 미소의 진화적 역사를 탐구한 글도 있으며, 인간의 친척인 침팬지의 풍부한 표정에 대한 글도 있다. 그 글들 가운데 한두 개는 반드시 내 머릿속에서 새로운 연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머지않아 더 큰 아이디어가 형태를 갖게 된다.
위의 방법을 전통적으로 파일을 탐색하는 방법과 비교해보자. 컴퓨터는 순종적이지만 멍청한 집사와도 같다. “침팬지에 대한 서류를 찾아줘!” 그것은 그냥 검색이다. 반면 데본씽크 방식은 탐구다. 잘못된 시작도 있고 간혹 주제와 관계없는 것을 찾아내기도 하지만 행복한 우연과 예상치 못한 발견이 있다. 사실, 결과의 불분명함이 그 소프트웨어의 강점 중 하나다. 그 시스템을 통한 뜻밖의 발견은 2가지 다른 힘에서 나온다. 첫째, 의미적 알고리즘의 연결하는 힘이다. 이는 똑똑하지만 예측할 수 없기에 잡음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검색 결과를 더욱 놀랍게 만든다. 그 사실은 어떤 면에서는 개별적 연결들이 나에게 쓸모 있을 가능성을 훨씬 더 높인다.
데본씽크에서 검색하고 결과를 처음 보면 언뜻 보기에 무질서하게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읽어보면 눈길이 가는 대목이 분명 있다. ‘무질서하다’는 것과 ‘연결이 안 된다’는 것은 꿈속의 탐험을 묘사할 때 쓰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적절한 비유다. 데본씽크는 꿈을 꾸는 상태에서 뭔가를 만들어내는 소프트웨어다.’
— 탁월한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오는가, Chapter 4 뜻밖의 발견 중, 스티븐 존슨
얼마 전에 문득 “체계적인 학습”을 하고 싶어서 관심있는 분야의 자격증 시험을 봐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그게 정말로 내가 바라는 것인가?”라는 질문이 들자마자 시들해졌다. 구조화되어 있는 정보를 체계적으로 학습하는 것은 매력적으로 느껴지지만, 사람들이 정보를 다루는 방식이 “아주 많이 다르다”는 걸 생각해보면, 체계적인 학습이라는 것은 어떤 집단의 전문성을 같은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는 있지만 다른 가능성들을 질식시켜버리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건 그것대로 필요한 일이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아니다.)
내가 정보를 정리하는 아주 좋아했던 방식은 위키위키였다. 10년 전쯤에 위키에 푹 빠져있었다. 위키위키는 모든 정보를 느슨하고 그리고 긴밀하게 연결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도구이다. 그리고 Graphviz와 같은 도구를 사용하면 이러한 연결들을 다시 추적하고 정보 간의 새로운 관계를 드러내게 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게 만든다. 나는 내가 사용하던 위키 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해서 프로그래밍을 처음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자동으로 생성하는 페이지들을 포함해 몇 천 페이지의 정보를 위키에 집적해두었다. 하지만 웹 기반 위키위키는 접근성이 떨어지고, 사용하던 애플리케이션의 한계로 금방 흥미가 시들해졌다. 지금은 베어를 위키로 사용하고 있다. 베어는 위키위키로 만들어진 애플리케이션은 아니지만, 바로가기 기능과 베어의 내부 링크 기능을 활용하면 훌륭한 개인 위키위키 시스템이 된다. 그래서 내 베어 앱은 노트가 아니라 주제어를 기반으로 작성된다. 생각날 때마다 주제어들을 검색하고 내용을 채워나간다. 여기도 이미 몇 천 페이지가 쌓여있다(대부분의 페이지는 비어있다). 베어는 이제 내 기억의 외부 캐시 메모리에 해당한다.
나는 베어를 축적의 목적으로 사용해가지만, 반대로 베어를 정보를 조각하는 용도로 사용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외부에서 받아들이는 수많은 정보가 있는데 자신이 충분히 이해한 내용을 다시 압축된 형식으로 베어 노트에 저장해 놓는 것이다. 내가 베어를 사용하는 방법도 일반적이지 않을 수는 있긴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었다. 이런 방식은 스티븐 존슨이 같은 책의 3장에서 이야기해주는 비망록의 방식을 떠올리게 한다.
완전히 다른 방식이지만 베어는 두 가지 방식을 포용하기에 충분히 매력적인 도구이다. 스티븐 존슨의 이야기하는 세렌디피티로서의 역할은 중간 쯤에 해당한다. 최근에는 노션이 유행하고 있지만 노션은 세렌디피티보다는 구조화를 충동질하는 도구이다. 정보를 조직화하는 데는 매력적이지만 글을 쓰기에는 너무 불편하고, 검색 기능은 💩이다. 노션은 정보에 대한 주도권을 확실하게 잡고 있지 않다면 사용하기 어려운 도구이다. 이와는 반대로 스티븐 존슨이 이야기하듯이 데본씽크는 세렌디피티의 끝판왕이지만 잘 다루기는 너무 어려워서 나는 포기한 상태다.
인용에서도 드러나지만 데본씽크는 세렌디피티라는 관점에서 너무나도 매력적이다. 데본씽크를 처음 본다면 스크리브너와 비슷하게 세련미는 떨어지고, 아마추어적인 모습을 군데군데서 발견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도구를 도대체 어떻게 써야하는지 감도 오지 않는다. 하지만 곧 데본씽크는 세상의 모든 정보나 내가 가진 모든 정보를 집어넣으면 뭔가가 자동적으로 만들어져 나올 것 같은 착각마저 들게 한다. 어떤 면에서 이는 위키위키 이상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기분은 곧 좌절하고 마는데 확장성 면에서 제약이 아주 크다. 이는 마치 위키위키의 데이터를 원시적인 파일 시스템 기반의 CVS에서 어떻게 데이터베이스나 클라우드 환경으로 옮길 것인가 하는 문제를 떠올리게 한다. 데본씽크는 자체적인 웹 서버 기능이나 싱크 기능을 제공하지만 이에 만족하며 사용하는 사용자는 많지 않은 걸로 알고 있다. 나도 몇 번 시도하다가 지금은 두 손 두 발 다 든 상태이다.
하지만 조금 생각을 바꿔보면 데본씽크는 모든 것을 부어 녹일 수 있는 용광로가 아니라, 적절한 정보들을 쌓아두고 활용할 수 있는 아주 두꺼운 스크랩북 같은 도구이다. 데본씽크는 “예감”이 드는 그런 도구이다. 확실하진 않은데, 이건 뭔가 굉장한 것 같다. 어쩌면 내 삶을 바꿔놓을 지도 모를 만큼 말이다. 나는 위대한 소프트웨어는 언제나 근본적인 아이디어의 탁월함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예를 들어보자면 위키위키, 베어, 율리시스, 스크리브너, 후잉 이런 도구들은 유사한 도구들로 대체할 수 없는 독보적인 아이디어들을 품고있다. 여기에 예감이 있다. 위키위키를 처음 봤을 때 너무 황당했지만, 여기에는 뭔가 있다는 예감을 가지고 이 시스템에 매료되기까지 3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최근에 팟캐스트에서 후잉 이야기를 다뤘는데, 다들 이야기하는 게 후잉을 이해하고 제대로 활용하기까지 몇 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그렇게 몇 번을 재시도하면서까지 이 도구를 도전하고 매료되는 동력에는 분명 어떤 예감이 있을 것이다.
데본씽크도 그런 도구지만, 아직은 예감만 가지고 있는 단계이다. 주변에서 잘 쓰고 있는 경우도 아직은 거의 못 본 것 같다. 위키위키, 베어, 스크리브너, 데본씽크 같은 도구들은 단순히 도구가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지는 도구가 아니다. 도구, 사용자의 맥락, 그리고 사용자가 적절하게 결합되었을 때 (사용자에게) 가장 큰 가치를 만들어낸다. 이런 도구들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들은 애플리케이션 개발자의 의도를 벗어나서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스티븐 존슨은 데본씽크를 예감을 넘어 활용의 단계에 있는 것 같은데, 다시 한 번 도전해봐야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9월 12일 Devonthink 3가 출시되었다. 요즘 관심을 가지지 못 해서 모르고 있었는데 상당히 긴 시간 동안 베타 테스트를 거친 것으로 보인다. Devonthink 2와 근본적으로 달라진 점은 없는데 기본 기능들을 개선하고 메인 윈도우 기반으로 인터페이스를 통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