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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리브너(Scrivener)와 긴 글 쓰기

스크리브너는 직업으로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갈수록 많은 인기를 얻고 있지만, 모던한 앱들의 세련된과 완성도를 생각했을 때 썩 만족스러운 앱은 아니다. 인터페이스는 낡았고, 아이클라우드나 드랍박스에 기반한 자연스러운 싱크를 지원하지도 않으며, 메인 에디터는 기본 텍스트 에디터와 같은 rtf 기반이다.1 그럼에도 스크리브너가 인기 있는 이유가 있다. 나는 글쓰기에 베어율리시스를 주로 사용하지만 2만자 이상의 글을 쓸 때는 이런 노트 애플리케이션보다 스크리브너를 선호한다. 스크리브너는 글쓰기에 대한 독자적인 철학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철학을 훌륭히 구현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도구들은 스크리브너의 자리를 함부로 넘보지 못 한다.

명확한 기준은 없지만,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내가 스크리브너를 다른 도구보다 선호하는 기준은 2만자 정도이다. 보통 IT 전문서에 코드나 이미지가 포함되는 걸 고려했을 때 한 페이지에 700-800 자 정도가 되니, 2만자면 30페이지가 조금 못 되는 분량이다. 물론 그 이상이라고 했으니 상한은 없다. 나에게 이 길이는 의미가 있다. 이 길이는 내가 노트 하나에 적을 수 있는 최대 길이이다. 이 길이가 되면 더 이상 하나의 글을 대번에 파악하는 게 불가능해진다. 글은 제대로 구성되었는지, 앞뒤로 문맥은 어울리는지, 잘못된 내용은 없는지 검토하려면 끊임없이 앞뒤로 왔다갔다 해야하는데, 점점 정신은 산만해진다. 더욱이 베어나 율리시스 에디터는 이 정도 길이가 되면 반응도 조금씩 느려진다.

베어보다 율리시스가 조금 사정이 낫다. 율리시스는 긴 글을 나눠서 쓰고 한 번에 볼 수 있는 기능을 제공한다. 율리시스에서는 여러개의 노트를 선택하면, 하나의 노트처럼 연속해서 볼 수 있고 편집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리시스를 긴 글 쓰기에 추천하지는 않지만, 여기서 중요한 단서를 얻을 수 있다. 긴 글은 하나의 글이라기보다 일관성을 가지고 작성된 글들을 모아놓은 집합체라는 점이다. 실제로 스크리브너는 써본 사람이라면 이해하겠지만, 스크리브너는 글을 하나의 문서로 정의하기보다는 글들의 집합으로 정의한다. 앞서도 지적했지만 스크리브너의 에디터는 후지다. 그럼에도 스크리브너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의 긴 글을 작은 글들의 집합으로 정의하는 도구가 드물기 때문이다. 이런 철학을 끝까지 밀어붙인 도구는 스크리브너 외에는 발견하기 힘들다.

긴 글을 쓰는 도구로서 워드와 비교해보면 이 차이는 좀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마이크로소프트 워드도 긴 글을 쓰는 도구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만큼 훌륭한 도구이다. 하지만 스크리브너의 세계관은 조금 다르다. 예를 들어 워드나 스크리브너는 둘 다 개요를 작성하는 기능을 제공한다. 하지만 워드에서 긴 글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글이다. 개요를 작성하고 글을 작성하는 일은 하나의 거대한 글의 부분을 작성하는 일이다. 하지만 스크리브너에서는 개요로 작성되는 모든 항목들은 하나 하나가 온전한 글(부분)이 된다. 스크리브너에서 글(프로젝트)는 이러한 글들을 모아서 비로소 하나의 글이 된다.

비슷해보이지만 이 차이는 의외로 크다. 앞서 율리시스의 여러개의 글을 선택해서 하나의 글처럼 볼 수 있는 기능을 소개했다. 스크리브너에서는 이 기능을 스크리브닝 모드라고 부른다. 스크리브너에서는 각 부분을 완전히 독립된 글로 작성할 수 있고, 이러한 글들을 여러개 선택해서 한꺼번에 보고 그 상태에서 편집을 할 수도 있다. 심지어 선택은 순서대로만 가능한 것도 아니다. 순서대로 여러 글을 선택할 수도 있고, 목차에서는 떨어져있는 부분들을 각각 선택해서 볼 수도 있다(워드에서는 불가능하다). 스크리브닝 모드는 작성중인 글을 여러가지 시점에서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나는 이 차이가 바로 세계관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그 외에도 다양한 기능들이 있지만2 핵심은 바로 글을 바라보는 시각 그 자체이다. 이에 기반한 스크리브닝 모드와 아웃라이너를 대체할만한 도구는 별로 없다. 나는 플레인 텍스트로 글을 작성하는 경험을 사랑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 글을 작성할 때는 스크리브너의 리치 텍스트 에디터에서 글을 작성하는 경험과 결과물을 그에 못지 않게 사랑한다.3


  1. 그나마 최근에 iOS 앱이 출시되었지만, 이 역시도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 
  2. 스크리브너의 더 많은 기능이 궁금하다면 스크리브너 튜토리얼을 추천한다. 
  3. 리치 텍스트 에디터지만 주로 아스키닥(Asciidoc)으로 문서를 작성한다. 텍스트 에디터와 달리 문법 하이라이팅 같은 건 지원하지 않는다. 불완전하지만 내가 직접 필요한 부분에 직접 서식을 입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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