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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위키의 꿈: 베어(Bear) 8개월 사용기

베어를 사용하기 시작하기 시작한 건 비교적 우연이었다. 2017년 초 어느 스터디 모임에서 다른 분이 사용하는 모습을 보았고 깔끔한 에디터에 반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마크다운을 지원하지만 이미 율리시스(Ulysses)MWeb을 잘 사용하고 있었기에 큰 매력을 느끼진 못 했다. 그러다가 노트 애플리케이션 이야기를 하면서 베어 이야기가 한 번 나왔다. 누군가 베어를 잘 아는 사람이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야기를 나누면서 베어를 한 번 제대로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작이 이제 8개월 전이다.1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글은 율리시스에서 작성하고 있지만) 이제 다른 노트 애플리케이션은 거의 사용하지 않고, 글을 쓰는 대부분의 시간을 베어와 함께 보낸다.

에버노트의 초기 모습.  클라우드 싱크 기능은 없었고, 오직 데이터베이스로서의 노트 애플리케이션의 본질에 충실했다.

에버노트의 초기 모습. 클라우드 싱크 기능은 없었고, 오직 데이터베이스로서의 노트 애플리케이션의 본질에 충실했다.

나는 노트 애플리케이션의 팬이다. 클라우드도 지원하지 않은 시절부터 에버노트를 사용해왔다. 에버노트는 나를 제목없음.txt로부터 해방시켜주었다. 노트 애플리케이션은 파일 시스템에 의존하는 대신 노트들을 데이터베이스에 저장한다. 클라우드의 도래와 함께 이러한 노트들은 자연스럽게 다수의 기기들에서 공유된다. 하지만 여전히 한계는 있다. 노트 애플리케이션에서 기록들은 산만하게 부유한다. 노트 애플리케이션을 잘 써서 이미 수백 수천 개의 노트가 쌓여있는 사람이라면 이 문제에 공감할 것이다. 특히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오래된 노트들은 자연스럽게 잊혀지게 된다. 검색과 태그라는 강력한 도구가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이 많은 노트들을 정리하는 것이 버겁게 느껴질 뿐이다.

그래서 정보를 조직한다는 관점에서 노트 애플리케이션보다 위키위키를 선호한다. 협업을 통한 글쓰기에 있어서 위키위키는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위키위키에는 협업 못지 않게 중요한 특징이 있다. 위키위키의 문서는 주제 별로 작성된다. 주제 별로 작성되는 문서들이 쌓여나가고 사용자는 [[Document]]와 비슷한 문법을 사용해서 문서에서 문서로 가는 구멍을 만든다. 위키의 문법은 인터넷 상의 하이퍼링크보다 민첩하고, 긴밀하게 위키위키 내부의 문서들을 조직할 수 있게 도와준다. 위키위키의 문서들은 시간의 흐름에 전혀 게의치 않는다. 위키위키에서 협업을 지운 개인위키는 여전히 매력적인 도구이다.

노트 애플리케이션은 편리하지만 정보를 조직하기엔 부족함이 있고, 위키위키는 정보를 조직하기엔 매력적이지만 불편하다. 개인위키로 쓸만한 도구는 많지않다. 대부분은 웹 기반이었고, 사용자 경험에서 노트 애플리케이션처럼 매력적이지 않다. 10년 전쯤엔 위키를 사용했지만, 노트 애플리케이션들이 자리를 잡으면서 개인 위키를 포기한지도 10년이 되었다. 하지만 나에게 노트 애플리케이션이란 늘 개인위키의 불완전한 대안일 뿐이었다.

이제 베어가 등장할 시간이다. 베어는 여느 노트 애플리케이션과 다른 기능을 하나 가지고 있다. [[Link]] 문법을 사용해서 다른 노트에 링크를 걸 수 있다. 위키위키의 그 문법이다. 베어는 개인위키로 기획된 애플리케이션은 아니지만, 이 기능 하나만으로 가뭄에 단비 같은 노트 애플리케이션이 되어주었다. 나는 베어를 개인위키로 사용하고 있다. 모든 문서는 주제 별로 작성되고, 문서들은 링크를 통해 느슨하게 연결되어있다. 베어는 이제 내 지식을 저장하고, 외부의 정보를 스크랩하고, 글도 쓰는 하이브리드 애플리케이션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8개월간 2200개의 노트를 작성했다.2 위키로서의 기능을 보완하기 위한 간단한 알프레드(Alfred) 워크플로우를 작성해서 사용하고 있다.3 이렇게 나는 다시 개인위키의 꿈을 꾸고 있다.4

그렇다고 내가 베어에 반한 것이 단순히 위키 문법을 지원하기 때문은 아니다. 베어는 겉보기에는 단순해보인다. 하지만 이는 겉멋이 없을 뿐이고, 내실은 탄탄하다. 베어를 처음 시작한다면 FAQ를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의외로 다양한 기능에 깜짝 놀랄 것이다. 무엇보다도 베어의 마크다운 에디터는 독보적이다.5 프리뷰 없이 에디터가 그 자체로 프리뷰와 거의 동일하다는 점에서 베어는 율리시스의 계보를 잇는다.6 문서 작성은 플레인 텍스트 에디터와 다르지 않지만, 에디터의 표현 능력은 리치 텍스트 에디터 뺨친다. 베어는 율리시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베어의 에디터는 이미지를 문서에 저장할 수 있으며7 에디터 상에서 보여준다.8 플레인 텍스트와 리치 텍스트 사이에서 사용자들은 이미지의 화면 출력 여부에 대해서 선택권이 없었다. 그래서 많은 마크다운 에디터들이 마크다운을 HTML로 렌더링한 결과를 다시 프리뷰로 보여주는 방식을 사용했지만, 나는 이 방식을 진심으로 싫어한다.9

베어가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율리시스에 충분히 매력을 느꼈던 입장에서, 위키 기능까지 겸비한 베어는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노트 애플리케이션이었다.

  1. 이 글은 2017년 10월에 작성했다.
  2. 베어의 또 다른 장점 중 하나는 이 정도 규모에서도 느려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Devonthink나 Papers3 등 데이터에 비례해서 느려지는 데스크탑 앱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용하기 어려워진다.
  3. 아직 내가 만든 워크플로우는 공개하지 않았지만, 비슷한 워크플로우들을 이미 다른 사람들이 오픈소스로 만들고 있다. 관심이 있다면, chrisbro/alfred-bear 를 사용해보길.
  4. 사실 베어에서 핵심적으로 내세우는 문서 조직 기능은 내부 링크가 아니다. 베어는 디렉터리 분류를 지원하지 않고 문서 태그를 지원하는데, 이 방식도 독특하다. 트윗처럼 본문 내부의 원하는 위치에 태깅(#태그)을 할 수 있다.
  5. 엄밀한 의미에서 율리시스도 베어도 마크다운 에디터는 아니다. 마크다운과 거의 비슷한 문법을 지원한다. 대신 마크다운 출력과 Copy as Markdown 기능을 지원한다.
  6. 나는 율리시스와 베어가 플레인 텍스트 에디터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7. 일반적인 플레인 텍스트 에디터는 이미지를 저장하는 기능일 지원하지 않는다. 율리시스가 처음으로 Textbundle이라는 포맷을 통해서 이미지와 플레인 텍스트가 결합된 포맷을 지원했으며, 베어는 이 방식을 따르고 있다.
  8. 율리시스도 2017년 10월에 출시된 버전 12(37233)부터 에디터 상에서 이미지 프리뷰를 지원한다.
  9. 내가 이 방식을 원래부터 싫어했는 지는 잘 모르겠다. 적어도 율리시스나 베어를 사용해본 지금은 그렇다.

트위터를 그만두며

살아남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다시 침묵하는 것입니다.

— 존 론슨, 온라인 상의 모욕이 통제를 벗어날 때 생기는 일

트위터는 현재 온라인에서 사용하는 이름으로 가장 열심히 활동했던 공간이지만, 이제는 내 마음에서 멀어져버렸다. 트위터를 하고 있으면 기분이 좋지 않다. 기분이 좋지 않은 광경들을 반복해서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내 자신이 그러한 상황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동참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에 시달린다. 결국 트위터에서의 겪고 목격한 것들에 대한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 할 것 같다.

트위터가 귀여웠던 적이 있었다. 트위터의 멘션리트윗도 사실은 트위터가 발명한 기능이 아니다. 이러한 기능들은 마이크로 블로깅 플랫폼 위에서 사용자들이 제안한 재치였고, 그것들은 트위터 위에서 기능이 되었다. 이윽고 트위터의 공고한 정체성이 되었다. 하지만 문제가 여기에 있다. 이것들로부터 파생한 분명한 나쁜 점이 있다. 때때로 플랫폼의 나쁜 점은 사용자들의 오용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트위터의 나쁜 점은 트위터의 본질 그 자체이다. 트위터는 그렇게 디자인된, 그리고 그렇게 디자인 되어가고 있는 플랫폼이다. 둘을 떼어놓을 수가 없다.

트위터는 설계된 대로 동작한다. 트위터는 정확히 트위터의 리더십 팀이 원하는 작동방식 대로 작동한다. 끊임없는 분노, 증오, 걱정, 불안, 괴롭힘은 모두 설계된 것이다.

Twitter works that way by design. Twitter is working exactly like Twitter’s leadership team wants it to be working. The constant outrage, the hatred, the anxiety, the harassment — it’s all by design.

Twitter’s Great Depression – Mike Monteiro – Medium

트위터에서는 발신자에게도 수신자에게도 주도권이 없다. 트위터에서 타인의 발언에 대한 자극은 대단히 빠른 시간에 이루어진다. 특히 트위터 사용자에게 리트윗이란 데옥시리보 핵산 수준에 새겨져있는 명령과도 같다. 트위터에서는 특히 많이 리트윗되는 트윗들을 피하기 어렵다. 트위터는 이러한 트윗을 강제로 보여주진 않지만, 노출 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져있다. 그리고 그런 트윗들의 절반은 농담이다. 하지만 또 다른 절반은 분노와 정의감에 물들어있다. 처음에는 그러한 분노가 적절하고 공감해야한다고 느꼈다. 내 경우, 그러한 공감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는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나, 윤창중이 청와대 대변인이 되었을 때 그랬다. 그 때는 그게 좋은 것인 줄 알았다. 우리가 함께 분노하고 리트윗해야만 하는 것이 트위터라는 매체의 좋은 점이라고 믿었다.

당신은 조리돌림 당했다”(So You’ve Been Publicly Shamed)는 저자 존 론슨(@jonronson)이 자신의 가짜 계정(@jon_ronson)을 만들어 괴롭히던 사람들에 대해 조리돌림을 촉발시킴으로써, 정의를 구현했던 경험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한 쪽 극단에는 트위터 조리돌림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저스틴 사코(번역)의 사례가 있다. 사실 다른 경우에도 트위터가 작동하는 방식은 크게 다르지 않다. 단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것이 전달되고 소비되는 형식 자체가 이미 어딘가 잘못되어있다. 합리성은 어느 순간 심연으로 사라져버린다. 어떤 면에서 단지 공감하고 분노할 거리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트위터답게 얘기하면 세상에(혹은 트위터 상에) 리트윗이 많이될만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소재가 많을수록 좋다.

트위터의 지난 5년간의 주가 그래프(2014-2018)

트위터의 지난 5년간의 주가 그래프(2014-2018)

트럼프 당선 이후 트위터는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트위터는 2013년 기업 공개 이후 2018년 4분기 처음으로 흑자 전환했다. 주가도 많이 회복되었다. 그동안 사람들은 ‘트위터야 아프지마’라고 걱정해왔지만 한동안 트위터가 망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트럼프와 미국의 정치는 끊임없는 조리돌림 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정치적인 다름은 트위터의 소재가 된다. 일본에서는 트럼프가 트위터의 지하철 광고에 등장하기도 했다. 트위터와 트럼프의 관계는 우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트위터는 사회가 분열되고, 서로에 대한 분노가 많아질수록 흥하는 매체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분노 위에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옳기 때문에 어떠한 말이나 행동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트위터는 트럼프도, 이러한 사람들도 문제로 여기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람들과 트윗만 피하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까? 이런 상황을 극복하고자 트위터 위에서 통제권을 되찾고자 하는 시도들이 있다. 리트윗을 모두 꺼버렸더니 평화가 찾아왔다는 더 아틀랜틱의 기사는 이런 경우를 잘 보여준다. 심지어 특정 사용자의 팔로워나 팔로잉을 모두 차단해버리는 블락 체인과 같은 도구도 있다. 이는 인터페이스 조작이라는 점에서 나와 트위터 사이에서 발생하는 마찰을 교묘하게 숨겨버리는 기법이다. 이렇게까지 할만한 가치가 있다. 트위터는 그만큼 매력적인 플랫폼이니까. 하지만 그 뒤에서 트위터가 작동하는 방식까지 변화시키지는 못 한다.

트위터에도 사용자의 통제권을 회복하기 위한 장치들이 있다. 하지만 얼마나 멍청하게 설계되어있는 지를 본다면, 트위터가 사용자에게 이러한 통제권을 되돌려주는 것을 얼마나 꺼리는 지 잘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리트윗을 끌 수 있다. 하지만 특정한 사람의 리트윗만을 끌 수 있다. 그 사람의 리트윗은 안 보여도 하트를 누른 컨텐츠가 타임라인에 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은 끌 수도 없다. 마치 리트윗 끄기 기능을 트위터 스스로 온몸으로 부정하는 것 같다. 모든 사용자의 리트윗을 꺼버려도 문제다. 새로운 사용자를 팔로우할 때마다 일일히 리트윗을 꺼야한다.

트위터에는 계정을 숨기는 기능이 있다. 이 기능을 사용하면 다른 사용자가 내 트윗을 리트윗하지 못 하도록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기능은 리트윗에 대한 통제권을 제공해주는 것이 아니다. 계정 자체를 숨겨버리기 때문에 이미 팔로워가 아닌 사람들은 더 이상 내 글을 읽지 못 한다. 나는 이 두 가지가 의도적으로 분리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트위터에서 통제권을 회복하려고 할수록 늪에 빠진 기분이 되어버린다. 트위터란 원래 그렇게 디자인되어있는 것이다.

제 친구 아담 커티스가 말하길 인터넷은 1980년대 존 카펜터의 영화같다고 하더군요. 모두가 서로에게 소리치고 총을 쏘기 시작해 결국 모두가 안전한 곳을 찾아 달아나는 모습이 비슷하다고요.

— 존 론슨, 온라인 상의 모욕이 통제를 벗어날 때 생기는 일

트위터 중독자에게 트위터를 그만두는 것은 쉽지 않다. 표현에 대해서도, 관계에 대해서도 그렇다. 하지만 감당할 수 없다면 적절한 달아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트위터는 그 고유한 성격에 있어서 대체할 수 없는 매체지만, 대안이 없는 것은 아니니까.

기계의 한계를 결정짓는 요소. CPU 클럭 혹은 인간의 욕망

“미래는 이미 와있다. 단지 널리 퍼져있지 않을 뿐이다.” – 윌리엄 깁슨


지인과 이야기하다가 발전 사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발전사관은 인류의 본성이 아니냐고 할 만큼 사람들의 마음 안에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것은 사회 문화와 역사에 대해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기술 역시 발전한다. 적어도 나는 사회 / 문화 / 역사의 발전사관은 처음부터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이다. 그런 것들은 단지 놓여진 상황이 변할 뿐이지, 명확한 지표도 없는 것을 ‘발전’으로 묘사하는 것부터가 이미 이데올로기적이다. 그런데 기술은 어떤가. 기술이 CPU의 클럭 속도나 단위시간당 생산량 따위로 치환해서 설명될 수 있다면 기술은 분명 발전해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그 말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기술이 충분히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기묘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기술의 발전은 이미 우리가 그 기술의 발전을 인지하는 정도를 넘어서버렸다. 과학과 기술의 발견과 발전은 인류가 해낼 수 있는 능력의 관점에서 사람들이 향유하고 있는 기술을 뛰어넘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최첨단 기술이 상용화에 몇 년에 걸린다는 이야기만을 지적하는 것은 아니다. 상용화에 걸리는 시간은 기술적 완결성과 일반인들이 기술을 이용할 수 있는 사이의 시간적 거리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한 시간적 거리는 시간에 의해서 작동적으로 매워지고 말 것이다. 마치 세탁기, 냉장고, 컬러 TV, 컴퓨터, 스마트폰이 시간이 지나면서 인류에게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보편적이고 필수적인 물건이 된 것과도 비슷하다. 그렇다면 기술의 발전이 인지를 넘어섰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나는 그 의미가 바로 “미래는 이미 와있다”라는 윌리엄 깁슨의 이야기와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역전이 가장 극적으로 일어난 분야가 바로 개인용 컴퓨터이다. 컴퓨터를 하나의 계산 기계로 바라보자면 컴퓨터가 단위시간 당 계산해낼 수 있는 양은 전적으로 컴퓨터의 하드웨어적인 성능에 달려있는 문제이다. 하지만 이미 개인용 컴퓨터가 수십년 전의 슈퍼 컴퓨터의 계산 능력을 넘어서있다고 얘기할 때, 모든 개인용 컴퓨터의 소유자들이 그러한 컴퓨터의 성능을 최대로 활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바로 컴퓨터로 가능한 일들이 우리의 인지를 뛰어넘어버린 것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컴퓨터의 역량을 최대한 활용할 만큼 컴퓨터에게 많은 일을 시킬 수 없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바를 좀 더 정식화해보자면, 컴퓨터의 능력이라는 것을 바라보던 기존의 시각은 f(컴퓨터의 하드웨어적 성능)이다. 즉, 컴퓨터의 한계는 하드웨어적 성능에 의해서 결정되는 함수인 것이다. 미래가 와 있다는 말은 컴퓨터의 하드웨어적 성능은 이미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처리하고도 충분할 만큼 컴퓨터 성능이 좋아졌다는 것을 의미힌다. 적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컴퓨터의 하드웨어적 성능이 부족해서 내가 하고 싶은 걸 처리할 수 없다는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만약 정말로 그렇다고 할지라도, 하드웨어를 교체하면 대부분의 경우는 해결가능하다.

더 이상 컴퓨터의 한계를 나타내는 f(x)라는 함수가 있을 때 x라는 독립 변수는 컴퓨터의 하드웨어적 성능이 아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단지 멀리 퍼져있지 않을 뿐이다”. 이 한계를 결정짓는 것은 일단 하드웨어가 아니다. 나는 이 독립변수가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인터페이스다. 이미 컴퓨터로 하는 일은 단순 계산을 벗어났으며 우리가 어떤 일을 처리하고자 할 때는 그에 대한 적절한 인터페이스를 가진 소프트웨어를 필요로 한다. 문제는 처리하고자 하는 일과 이 일을 처리할 적절한 소프트웨어가 없을 때 기본적으로 컴퓨터의 한계는 하드웨어의 한계가 아닌 인터페이스의 한계에서 결정된다. 컴퓨터는 만능 머신이지만, 이 만능 머신이라는 뜻이 반드시 모든 일을 처리하기 위한 적절한 인터페이스를 갖추고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두번째는 인간적인 요소다. 대표적으로 디지털 리터러시라는 표현이 있다. 사람이 컴퓨터가 작동하는 방식을 얼마나 잘 이해하는 지, 그리고 어떤 일을 어떤 소프트웨어로 처리할 지에 대한 적절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만 컴퓨터의 활용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초적인 문제조차도 컴퓨터의 능력을 극도로 떨어뜨리는 아주 치명적인 요소가 되곤 한다. 단순히 디지털 리터러시 뿐만이 아니라, 욕망 또한 중요한 문제이다. 컴퓨터는 스스로 작동하는 기계가 아니다. 컴퓨터가 무엇을 계산하는 지는, 혹은 무엇을 계산해야하는 지는 전적으로 인간에게 달려있다. 인간은 컴퓨터 위에서 오히려 단순 노동으로는 대체될 수 없는 일들을 더 많이 해나가고 있다.

아직 지저분하지만, 컴퓨터의 한계를 결정짓는 요소를 통해 다시 함수를 정의해보자. 컴퓨터의 능력을 한계짓는 함수는 f(컴퓨터의 하드웨어적 성능)이 아니라 MIN(하드웨어의 성능, 인터페이스, 인간의 능력과 욕망)에서 결정된다. 그런데 하드웨어 성능은 이미 충분한 것이라고 가능한다면, MIN(인터페이스, 인간의 능력과 욕망)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 함수가 틀렸고, 기술의 발전이 인간에게 자동적으로 적용되는 거라면 기술 격차라는 것은 결코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술 격차가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러한 기술의 혜택을 누리는 정도에 대한 빈부 격차만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은 결코 사실이 아니며, 이미 기술 격차라는 것은 아주 선명한 문제이다.

역설적으로 인간의 의해 기술이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충분히 발전된 기술의 가능성은 그 자체로서는 존재하지 않고, 인터페이스와 인간의 지식에 의해서 처음으로 그 가능성이 현실로 발현된다. 어쩌면 여기에 기술의 발전 위에서조차, 혹은 그러한 혜택을 충분히 누리면서도 발전사관을 거부할 수 있는 단초가 있을 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기술의 발전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컴퓨터의 하드웨어적 성능이 앞으로 계속해서 무한히 늘어난다고 해도 그것이 곧바로 더 큰 능력을 가진다고 말해야할 지는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앨런 케이가 맥루한의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말에 영향을 받은 것처럼, 개인용 컴퓨터는 기계적인 계산 기계가 아니라 오히려 미디어에 더 가까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그 기계를 충분히 내화시키지 못 한다면, 결국에 컴퓨터의 능력은 바로 그 지점에서 제한되어버리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는 이미 와있고, 널리 퍼지지 못 한 것은 그것을 충분히 내화하지 못 한 사람들에게는 존재하지 않은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넓은 의미에서 해커들은 자신들이 일정부분 가장 진화된 인류라고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가장 발달된 기술을 향유하기 때문이 아니라 기계의 가장 큰 가능성을 끌어낼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SF 영화를 보면 미래사회에서 충분히 사이보그화된 주인공에게 지식을 주입하는 장면이 나오곤 한다. 사이보그화는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신체를 강화시키는 사이보그를 넘어, 그 안에 숨겨져 있는 기계의 잠재성은 그 사이보그 주체의 지식에 의해서 결정될 수 밖에 없다. 뒤돌아 생각해보면 이러한 지식의 주입이 미디어로서의 미래 세계를 주인공에 내화시키는 일이 아닌가 싶다. 기술을 발전시킴으로서 그 변화가 주인공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술에 대한 지식을 주입함으로서 기계의 가능성과 인간의 가능성이 동시에 극대화되는 것이다. 기계가 진화한 것이 아니라, 이미 기계는 충분히 진화해있다. 이러한 진화된 기계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해 인간의 지식을 넓힌 것이다. 그러한 미래 사회에서,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서도 이미 모든 기계는 단말기가 아닌 범용 컴퓨터화되었다.

집을 생각해보자. 스마트 홈 시스템에서 모든 전자기기는 컴퓨터일 것이다. 컴퓨터는 외부의 다른 컴퓨터나 인간과 소통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를 가진다. 하지만 단순히 모든 전자기기가 컴퓨터라는 데서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우리가 그것들과 좀 더 고도의 커뮤니케이션을 하기 위해서는(즉, 내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좀 더 일반적이고 서로 연동가능한 API가 필요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전자 기기들은 이러한 인터페이스를 가지고 있지 않을 뿐더러, 있더라도 독자적인 표준을 따른다. 즉, 모든 전자기기는 컴퓨터이지만 서로 소통하지 못 하고, 외부의 중계 또한 받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스마트 홈 시스템은 각각의 기기들 간의 소통이나 사람과의 소통을 증진하는 방향이 아니라, 하나의 업체가 집 전체를 일괄적으로 설계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기 쉽다. 그것들은 기본적을 기기들 간의 소통을 증진 시키기 위한 개선이다. 간헐적으로 기기들간의 소통이 증진된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사람의 욕망은 대개 좀 더 복잡하게 기술되어야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자동화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마치 데스크탑 위에서 애플리케이션 간 자동화를 구축하듯이 전자기기들 간의 워크플로우를 만드는 범용적인 인터페이스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인터페이스들은 대개 충분히 복잡할 텐데 사람들은 이 인터페이스를 통해서 자신의 의사를 얼마나 잘 전달할 수 있을까? 나는 단순한 보일러 조작 단말기한테도 매번 내 의사를 전달하는 데 실패하는데 말이다. 모든 기기들은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어있다. 이것들을 궁극적으로 다음 단계로 고양 시키는 것은 결국에 인터페이스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지식이다. 거꾸로 말하면 이제 컴퓨터 시스템의 한계는 컴퓨터의 연산능력이 아니라 바로 개인의 지식에 의해서 한계 지어진다.


바네바 부시가 개인용 컴퓨터의 청사진을 그리는 동안에, 그러한 하드웨어적 장비들은 현실적으로 구현되지 않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기획은 처음부터 공장-기계들의 가치와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단위시간당 생산량이란 원래 공장-기계이 가치를 판단한기 위한 지표이다. 그런데 이미 바네바 부시의 기획이 하드웨어적으로 충분히 가능해진 시점에서 바라보자면, 그의 기획이 그랬던 것처럼 개인용 컴퓨터에는 단위시간당 생산량이란 지표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 불분명한 일이 벌어지고 만다. 만약 우리가 개인용 컴퓨터를 이야기하면서 여전히 CPU의 클럭수를 가장 중요한 요소로 생각해왔던 거라면 여전히 그것을 공장-기계로 받아들여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더 빠르고 더 많은 것을 해내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 가장 빠른 컴퓨터가 수십만배 빠른 컴퓨터가 있더라도 이미지 편집용 소프트웨어가 작동될 수 없다면, 그것보다 수십만배 느려도 이미지 편집용 소프트웨어가 있는 컴퓨터가 나을 수도 있다. 클럭은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단위가 아니며, CPU는 인간이 직접 접근 가능한 인터페이스도 아니다.

그래서 흥미롭게도 어느 지점에서부터는 더 이상 기술의 한계는 기술적이지 않고, 사회적이거나, 개인적이다. 인터페이스, 그리고 욕망. 그 순환 과정은 결국에 인간의 문제다. 인터페이스는 우리가 컴퓨터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정의한다. 기계에 대한 지식은 곧 인터페이스에 대한 이해이자, 인터페이스를 확장시킬 수 있는 컴퓨터와 인간이 맞닿게 만들어주는 능력 자체이다. 그리고 결국에 그 위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가가 우리의 욕망이다. 욕망이 지식을 습득하는 원동력이 되고, 결국에 기계를 이해하는 것이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기계의 능력은 이제 사용자의 능력으로 정의된다. 기계의 클럭은 계산을 몇 번 할 수 있는 지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능력이 충분할 때 기계가 최대한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실은 모든 도구가 그렇다. 도구의 능력을 한계지우는 건 사용하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단순한 도구조차도 잘 쓰는 사람을 존경심 어린 눈으로 쳐다본다.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 말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를 그런 식으로 치환해서는 안 된다. 컴퓨터는 범용적 도구이고, 비유하자면 완성형 니미츠급 항공모함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능력이 도구의 가치를 초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컴퓨터라는 도구는 이미 사람들이 그 한계를 초월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되어 있고(이것은 마치 비행기 조종석의 복잡함 같은 인터페이스의 복잡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 가치는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운용하는 지에 의해서 결정된다. 또한 그 방향성 역시 사람의 욕망에 의해서 결정된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노동을 절감해주는 컴퓨터가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증가시켜 주는 컴퓨터이다. 즉, 때로는 말장난을 하기도 하고(이것은 맥루한의 생각이다), 이전에는 생각치도 못했던 것을 알려주는 조이스(Joyce)의 가교역할을 하기도 하며(이것은 브라운의 생각이다), 컴퓨터가 우리를 작가에 주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작가로 만드는 것이다(나의 생각이다). – 존 케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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